‘헌법’은 재판관 6인에 의해 헌법재판을 결론 낼 수 있게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법’은 7인이 아니면 결론은 커녕 심리 자체를 못 열게 하고 있다. 헌법과 법이 충돌할 경우 어느 게 우선되어야 할까? 헌법이 뿌리이고 법이 가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헌법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사안은 다툼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백한 위헌이다. 나는 우리 법에서 이런 명백한 오류를 발견할 때면 다른 것보다도 애초에 이런 법이 왜 생겼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법이란 필시 누군가가 만든 것인데, 그 누군가는 왜 법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걸까?
우리 법에는 뿌리를 찌르는 가지가 셀 수 없이 많다. 앞서 간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등산 좀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앞사람이 신경쓰지 않고 걸으면 앞사람이 아무렇게나 헤집은 가지가 뒷사람의 눈과 맨살로 날아들기 마련이다. 우리 법 역사가 꼭 그렇게 흘러왔다. 개개인의 역량 문제라기보단 시대적 한계이자 구조적 문제였지만, 법이 형성되던 초기의 엘리트 층은 그 시절 우리의 참담한 국력에 걸맞는 수준을 가진 ‘우리만의 엘리트’로서 법을 단단하게 구성할 능력이 없었다. 이후에도 줄곧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사회는 단기적인 성과지향형 기치를 내걸고 나아왔고, 이는 등산로를 닦는다거나 뒷사람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 그저 산꼭대기에 오르고 보자는 식이었기에 미래의 질서나 균형을 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결과 법전 곳곳에 급조된 땜질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오늘에 이른 것이다.
법에서 벌어진 흉한 땜질은 그 땜질을 맡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물러난 뒤에도 남아 현세를 속박한다. 가령 88년도 체제를 구축한 엘리트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거나 극소수가 속세 밖에서 세월을 반추하고 있을 뿐인데, 그 체제 자체는 여전한 현역으로서 우리 모두를 단단하게 얽매고 있다. 그 외에도 구시대에 만들어진 온갖 법률이 단지 세월에 의해 골동품처럼 권위를 얻어 마치 진리인양 여겨지고 있다. 오늘의 사회를 겪지 못한 사람들이 만든 구시대의 산물이 시차를 두고 날아들며 가지처럼 우리 사회 곳곳을 찌르는데, 우리는 온몸이 찢기면서도 거기에 깊은 뜻이 있으리라 믿으며 법에 손을 대는 데 극도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우리가 법을 그저 준수해야 하는 것으로만 배웠기 때문이며, 이 역시 구시대의 권위주의가 우리에게 세뇌시킨 정신이다.
기본적으로 꽃과 가지는 꺾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꽃과 가지를 꺾으면 안 된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우리의 각막을 앗아가기에 적합한 위치에 놓인 가지나 누가 등산로 중앙에 멋모르고 심어둔 미치광이 버섯 같은 건 꺾어 없애야 한다. 법도 마찬가지다. 법을 진리로 준수해야 한다는 망상을 가져선 안 된다. 법은 기본적으로 ‘내가 알지 못하고 나하고 사상·경험이 전혀 겹치지 않는 과거의 누군가가 특정한 상황아래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만든 임시변통’이라고 보아야 한다.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집중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며 건네는 불상의 음료와 비슷한 정도로 의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납득할 수 없다면 준수할 게 아니라 지적해야 한다. 여차하면 부러뜨려서 등산로 밖으로 던져야 한다. 그게 나 자신과 뒷사람과 등산로 모두에 이롭다.
과거의 사람들이 무조건 못났다는 말은 아니다. 과거의 사람들은 과거의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을 것이다. 모든 법은 그들이 최선을 다해 사는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일 테다. 다만 오늘의 사람들도 오늘의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엔 오늘에 필요한 것이 있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건 필요에 의해 없앨 수도 있어야 한다. 과거의 사람들이 선의를 갖고 진지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오늘의 사람들이 빗살무늬토기를 계속 써야 할 의무는 없다. 이제 빗살무늬토기가 있어야 할 곳은 우리 주방이 아니라 박물관이다. 하물며 빗살무늬토기도 그러한데 그보다 실용성 없고 가치 없는 철 지난 구닥다리 법률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건 법전에서 지워버리는 게 답이다. 그리고 구닥다리 법을 솎아내는 가지치기는 더 이상 엘리트 법률가들에게만 맡겨둘 일이 아니다. 엘리트 전문가들은 오히려 잘못된 법을 무작정 준수함으로써 방치시키고 사법 수준을 오늘에 이르게 한 장본인들이다. 일례로 법원이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을 받아들이는 비율은 1%가 되지 않는다. 국민이 법원을 통해 법률의 위헌성을 다투는 제도가 먹통이 되어 있는 것이다. 법원은 법률의 문제점을 시정하는 데 있어선 방해가 되는 장애물로 기능해 왔을 뿐이다. 현재 문제가 된 헌법재판소법도 마찬가지다. 모든 헌법재판의 전제가 되는 법이 헌법에 위배되는 내용으로 규정된 채 방치되어 있는 건 엘리트 전문가들이 본분을 다하지 못한 결과이자 그 증거다. 본분을 다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거라는 데 방점을 두고 읽어야 한다. 그들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다수의 법률가들은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라 기존의 법을 적용하는 실무 기술을 익힌 사람들일 뿐, 법 그 자체의 당위성을 스스로 판단하고 사법의 미래를 개척하려는 능동적인 운동가들이 아니다. 그리고 찰나 같은 인생 엘리트 전문가들이 우리보다 배워봐야 얼마나 더 배웠겠으며 인생과 사회의 참된 방향에 대해 알아봐야 얼마나 더 알까. 실상 모두가 정답을 모르는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저마다 주체가 되어 판단해야 하는 이유다.
북한에도 법이 있다. 법이 아무 소용 없는 유사국가에도 저마다의 법은 있다. 그로부터 우리는 법의 본질을 알 수 있다. 소수가 규정한 법이 무조건 강요되는 사회는 경직된 사회이고, 갈등없이 준수되는 법은 나쁜 법이다. 자유로운 사회에선 법을 향해 저항할 자유까지 보장되며, 좋은 법은 끊임없이 지적받으며 발전하는 법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는 북한 수준은 아니어도 경직된 사회이며 좋은 법이 드문 사회다. 그러므로 나는 보다 많은 사람이 법을 꺾으며 나아가길 바란다. 거슬리는 가지들을 보는 족족 분지르길 바란다. 전문가들을 맹신 말고 스스로 판단하기를 바란다. 어느 새벽 아무도 없는 도로에서 의미 없이 켜져 있는 신호를 준수하는 태도만이 양심인 게 아니다. 그런 시간엔 신호등을 끄고 자율적으로 도로를 이용하게끔 시스템을 바꾸자는 것도 양심적인 발상이다. 그러니까 부숴버리자. 구닥다리 법은 되는 대로 태워 버리자. 이유 없는 권위엔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런 문화가 정착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헌법재판소법 끄트머리에 불을 붙여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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