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 이유 제한 법리 위헌소원 上

JBtracer 2025. 5. 9. 11:48

 

  법은 투명해야 한다. 누구나 접근해서 사안의 구체적인 내용을 언제든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결과에 속박됨 없이 두고두고 학술적으로든 사실적으로든 재론하고 비판하고 재평가할 수 있고, 그로써 법치는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로서 신선하게 유지·발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법은 여지껏 지독하리만치 폐쇄적이었고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에 불과했다. 시민들이 알 수 있는 건 판결의 결과값이 전부인 실정이다. 인용이라더라, 기각이라더라, 누가 무죄를 받았다더라, 누가 유죄로 몇 년을 받았다더라, 이런 알맹이 없는 내용이 우리 사회 내 법적인 토론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그 외의 이야기는 하면 안 된다는 희한한 주장이 우세하기까지 하다. 예컨대 주요 언론은 누가 어떤 판결 결과에 반하는 의견을 제기하면 대법원 판단까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헛소리를 한다는 식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판결은 진리가 아니라 효력을 가진 의견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간이 내놓는 거의 모든 의견이 그러하듯, 판결 역시 항상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판결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결과가 아니라 쟁점과 내용에 기반해 개개인이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상고 이유 제한 법리를 다투고 있다. 이 법리는 쉽게 설명하면 ‘2심에서 주장하지 않은 건 3심에서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구조적인 모순이 있다. 2심의 결과는 2심이 끝날 때까진 알 수가 없는데 2심의 시작에 앞서 3심에서 다툴 내용을 예측해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아닐 수 없는데, 무엇을 근거한 법리일까? 모든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그러하듯 이 역시 당연하게도 근거가 없다. 그냥 대법원이 정한 것이다. 정말로 그냥대법원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0년도 더 전에 대법원이 그냥 그렇게 하기로 정했고, 모두가 기계적으로 따른 결과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정말로 근거가 없어서 달리 근거가 없다는 사실로서 보여줄 만한 것조차 없다. ‘대법원이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지~’하는 우리 사회 특유의 망상이 말도 안 되는 법리를 유지시킨 근거이자 동력이라 하겠다.

「2017도16593-1의 대법관 조희대의 별개의견 中」

  다행히 대법원 내에서 그 법리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했던 대법관이 있다. 지금은 대법원장으로 있는 조희대 대법관이 그랬다. 그는 2019년에 상고 이유 제한 법리를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런데 왜 변한 게 없을까? 나머지 대법관들이 조희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고 이유 제한 법리가 있어서 일 적게 하고 다 기각 때리니까 신나고 편하고 좋은데 굳이 그들 스스로 그걸 바로잡을 이유가 있을까? 기득권이 으레 그렇듯 대법원이라고 다를 건 없다. 그들은 무단으로 얻은 권력을 내놓을 의사가 없다. 실제로 91, 2005, 2009, 2017, 상고 이유 제한 법리를 없애달라는 요구는 내내 있어 왔다. 문제는 하나 같이 '대법원에게' 요구했다는 것이다. 도둑에게 훔친 물건을 돌려달라고 호소해봐야 들을까? 그래서 번번이 좌절된 것이다.

  여러분은 상고 이유 제한 법리가 먼 얘기로 느껴질 것이다. 초딩 때 듣는 의무 복무 얘기처럼 아무래도 상관 없는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살면서 송사를 치르리라고 예상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법적인 분쟁은 불시에 생각도 못한 데서 터질 수 있다. 그런 경황 없는 순간에 상고 이유 제한 법리는 여러분의 등에 칼을 꽂는다. 내가 구치소에서 본 99%의 사람들은 상고 이유 제한 법리에 의해 상고를 기각당했고, 자신이 그로 인해 기각당했음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법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아주 어렵고 난해한 전문용어로 당사자의 의지를 꺾어 놓는다. 전태일 씨가 노동법 책을 들고도 읽지 못했듯, 단언컨대 현행 법리 내에서 비법률가인 일반인이 법에 규정된 대로상고심을 수행할 가능성은 없다. 서울대를 나왔건 동대문 봉제공장을 나왔건 마찬가지다. 법전에 나오지도 않고 결과를 받아보기 전엔 그 존재 자체를 알 수 없는 법리를 1심에서부터 염두에 두고 2·3심을 수행할 일반인이 어디에 있을까.

  상고 이유 제한 법리는 없애야 한다. 대법원에서 세운 무단 권한을 강제로 뺏어야 한다’. 지난 수십 년간 대법원이 법을 어기고 수 많은 사람의 권리를 도륙냈다는 사실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대법원이 앞으로는 성실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을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세우기 위해서 그것은 필요하다.

   나는 상고 이유 제한 법리를 대법원이 아니라 헌법재판소로 가져갔다.  현재 일 년 넘도록 심리 중이다. 나는 내 청구가 인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다만 인용되리라 확신할 순 없다. 헌법재판관들도 법원 친화적인 법률가들이고, 그들 역시 납득할 수 없는 의견을 너무나도 많이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과를 떠나 어떤 논리로 다투었는지 기록을 남겨두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머지 않아 상고이유 제한 법리에 관한 헌법적 해명을 얻게될 것이며, 나의 기록을 통해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언제든 결과 뿐만 아니라 전반 내용에 접근하여 사안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평가하고 재론할 수 있을 테다.

  대법원의 판단을 존중해야 최소한의 질서나마 유지될 수 있다는 국민들의 막연한 지지를 토대로, 대법원은 과분한 권위와 권한을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누려왔다. 특정 세대에 국한된 구성원이 전 세대의 문제를 평가한다. 철밥통으로서 세상물정 다양하게 겪었을 리가 없는 붙박이 직무임에도 경제·정치·학술·외교·역사·의학·예술 등등 온갖 분야의 권위를 초월하는 권한을 행사하며 그 결과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거국적 위기 앞엔 눈치 살살 보며 입을 닫고, 평화의 시기엔 국면을 주도하려 든다. 역사상 모든 오심은 대법원이 만든 것이다. 부친 살해의 누명을 썼던 김신혜 씨, 화성 연쇄살인의 누명을 썼던 윤성여 씨, 낙동강변 살인의 누명을 썼던 장동익 씨,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등도 다 대법원이 만든 것이다. 대법원이 국민의 상고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고 세태에 따라 보신적으로 처신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그들을 향한 막연하고 무조건적인 지지가 도리어 법치의 수준을 망가뜨린다는 사실이다. 이유 없는 지지는 대법원을 망친다. 알아서 잘 하도록 두는 순간 대법원은 알아서 잘 하지 않고 우리의 권리를 도륙낸다. 믿으면 보기 좋게 우리 등에 칼을 꽂고 씩 웃는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대법관들이 무슨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다름 없는 인간들이며 한 시절 교과 과정을 잘 습득하고 시험을 잘 본 덕으로 얻은 지위를 아무 견제 없이 수십 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 자신이 그런 상황에 있다면 우리는 과연 게으름 피우지 않고 예리한 감각을 유지하며 끊임 없이 세상에 발맞춰 발전하고 자신의 사회적 평판을 고려함 없이 중립적으로 헌신적으로 사건을 평가할까? 현실적으로 그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법원이 알아서 잘 하리라고 가정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들 이상으로 사안을 탐구하고 모든 의문을 하나하나 짚어 답을 요구해야 하며, 그들이 억지를 부린다면 그 억지가 유지될 수 없게 권한을 회수해야 한다.

  내가 바라는 법치는 그런 법치다. 토론이 허용되는 법치. 말 같지도 않은 억지에 누구든 다툴 수 있는 법치. 엘리트를 자처하는 소수의 소유물이 아닌 법치. 대법원일지라도 헛소리는 하면 안 되는 법치. 그런 법치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가능성은 별로 중요치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지금의 법치, 지금의 대법원이어선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기록을 남기고, 누군가는 읽어야 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누군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서로로 살길 게을리 했던 내가, 혼자가 되어 깨달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