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발 늦었다. 물리적인 한계로 어쩔 수 없는 지연이 생긴다. 이런 사안은 공명심 헌터들의 군침을 돌게 할 만한 것이기에 선착순 경쟁이 심하다. 아니다 다를까 모 로펌에서 발 빠르게 청구해서 메달을 따갔다. 가처분이 받아들여진 순간 이 게임은 끝난 것이다. 지명은 사실상 무효화 된 것이고, 헌재가 심판을 하건 말건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6월에 선출될 새 대통령이 헌법재판관을 임명하면 헌재가 심사 중인 헌법소원을 인용하든 각하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는데, 고민스러운 문제에선 발 빼는 헌재의 DNA에 입각해 보면 구할 이익이 소멸되었다는 무적의 논리로 각하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헌재는 이미 이 사안에서 게으름을 보이고 있다. 모 로펌의 최초 청구보다 내 청구는 3~4일 늦었다. 그런데 모 로펌의 청구는 일주일만에 사전심사가 통과되었고 나의 청구는 2주를 넘겼다. 경실련의 청구는 나보다 하루 늦었는데, 어떤 속도로 처리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좌우지간 이와같은 헌재의 선착순 만능주의는 헌재 역시 사안을 사회과시적으로 소모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사회적·정치적으로 헌재의 과시욕을 채웠으므로 그 이후의 청구들은 외면한 채 침대심사로 '구할 이익이 소멸될 때까지' 버티려는 게 아닌가 싶다. 이는 학술적으로 비판 받아 마땅하다.
같은 대상에 대한 청구일지라도 청구인마다 내세우는 논리가 다르다. 똑같은 탕수육과 소스를 두고도 찍어 먹어야 한다는 주장과 부어 먹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뉠 수 있듯이, 사람마다 헌법을 해석하는 방식과 기준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므로 헌법적 해명이 필요한 문제에선 청구의 순서와 무관하게 모든 청구의 논리를 같은 정도에서 심사해야 한다. 그런데 헌재는 형식 요건만 따지는 사전심사에서 선착순으로 확연한 차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앞 순번과 뒷 순번이 동일한 적법요건을 갖추고 있는데, 앞 순번은 초스피드로 허가하고 뒷 순번은 세월아 네월아 유월아 빨리와라인 것은 문제 있는 일이다. 헌재는 전체 청구 논리를 취합해서 균일한 기준으로 심사할 의지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한덕수의 지명을 막았으니까 된 것이다. 그들은 결론에 이를 마음이 없다. 그렇다면 왜 그 자리에 있는 걸까? 불가사의다.
한덕수 옹의 지명행위는 헌법적 결론이 필요한 일이다. 두 번 다신 없을 일이지만, 이 사안의 결과에 따라 우리의 헌법적 해석 기준이 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큰 싸움은 결말이 나야 한다. 그러지 않고 덮고 가면 작은 싸움이 멈추지 않게 된다. 없던 일로 할 수 없는 일은 없던 일로 하면 안 된다. 그 자체가 폐해가 된다. 헌법에는 정답이 없다. 우리는 정답을 찾고자 헌재를 둔 게 아니다. 사상경쟁의 결과를 얻기 위해 헌재를 둔 것이다. 정답이 없는 현실 속에 가장 타당한 논리를 세우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중대한 사안에서 헌재가 회피한다면 헌재는 필요가 없다. 청와대처럼 개방하고 관광객 유치에 쓰는 게 더 이로울 것이다.
현재 사건을 대하는 위헌논리는 통일되어 있지 않다. 임명행위를 위헌으로 전제하고 임명절차를 다투는 논리가 있고, 지정된 후보자의 자질을 지적하는 부류가 있고, 지명행위와 임명행위를 구분해서 다투는 논리가 있다. 더 나아가 '권한 대행은 대통령 몫 재판관을 임명할 권한이 아예 없다'는 시각과 '이 사안에서만 없다'는 시각으로도 나뉠 수 있다. 즉, 10건 가까운 헌법소원의 논리가 저마다 다 다른 것이다.
나는 이 사안에서만 없다고 본다. 그리고 지명행위에 위헌성을 두어야 한다고 본다. 대통령 권한대행의 권한은 정형화할 수 없는 성질을 갖고 있다. 대통령이 어떠한 이유로 불능상태가 될진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그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문제가 시급할지도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한대행의 권한은 개별적 상황에 맞춰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대통령이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을 지명한 뒤 불의의 사고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고 헌법재판소의 정족수가 미달되어 헌법 기능이 마비된 상황이라면 어떨까? 그럴 땐 권한대행이 이미 지명된 후보를 임명해야 한다. 이러한 가능성을 간과한 채 권한대행이 어떠한 경우에도 대통령 몫 재판관을 임명하지 못하게 결론내자는 것은 진지한 생각이 아니다. 이번 사안은 '이번의 지명행위가 위헌'인 것으로 결론내는 게 가장 타당하다.
한덕수 옹의 지명행위에 담긴 내심이 무엇인가? 헌법 기능을 수호하겠다는 덕수 옹의 말은 명분잡기이고, 사실상 차기 정부의 재판관 몫을 박탈하려는 속셈이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덕수 옹 그 자신도 알고 그 옆집 사는 사람도 알고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암묵적인 진실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속셈에 맞춰 사안이 다루어져야 한다. 권한대행의 권한이 일반론적으로 어떻고 하는 건 논할 필요 없이, 헌재는 대선이 60일 남은 상황에서 덕수 옹이 6년 임기의 재판관을 긴급하게 지명한 게 정말로 헌법 기능 수호를 목적한 것인지 아닌지만 심사하면 될 일이다. 당연히 아니므로 덕수 옹에게 다른 속셈이 있었던 것이라고 명시하여 역사에 남기는 게 헌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이고 해야 할 일이다.
덕수 옹은 대통령 궐위 시에 권한대행에게 1부터 100까지 A부터 Z까지 ㄱ부터 ㅎ까지의 모든 권한이 부여되고 그 권한을 자신의 자의적인 판단 아래 쓸 수 있다고 헌법을 해석하고 있다. 헌법 해석엔 정답이 없으므로 그런 해석이 절대적으로 잘못된 거라곤 할 수 없지만, 그의 해석은 인지상정에 반한다. 그런 해석을 막아야 하는 이유는 다름 없다. 그런 해석이 통상의 법 해석을 교란시켜 가뜩이나 엉망인 우리의 사법 균형을 초전박살 낼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안을 이유로 덕수 옹의 삶의 의의와 그의 법적인 경력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는 우리 사회에 엘리트로서 기여해 왔으며 아마 나름대로 진지한 사명감을 갖고 임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의 그는 뭔가 심각하게 잘못 판단하고 있다. 몇 년 전 유인태 옹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알던 한덕수는 저런 한덕수가 아니었어요."
우리는 유인태 옹이 알던 한덕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저런 한덕수'를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덕수 옹이 '유인태가 알던 한덕수'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나의 헌법소원은 덕수 옹이 '저런 한덕수'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기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돌아가야 할 시기는 온다. 그리고 누군가가 돌아가기 위해선, 세상의 도움이 필요하다. 헌재가 한덕수를 돌려주길 온 마음 다해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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