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크루스테스의 국민 참여 재판법

JBtracer 2025. 3. 8. 10:22

  본안 사건 1심 유죄가 나기 무섭게 헌재가 3년간 끌어오던 국민 참여 재판법 위헌소원을 만장일치로 기각했다. 법원을 선도해야 할 헌재가 도리어 법원 뒤에 숨어 따라가는 이런 보신주의적 처신이 참 싫다. 같은 날 헌재가 선고한 서른 건이  넘는 사안 중 인용된 건 역시나 마은혁 임명 건과 감사원-선관위 권한 쟁의 건 뿐이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하거나 자기들 이익에 직결되는 사안에만 헌법적 결단을 내리는 그들의 고질병. 그것은 헌재를 가루로 만들자거나 헌법재판관을 처단하자는 일각의 끔찍한 비난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헌재의 필사적·희생적 몸부림으로까지 보인다. 헌재가 이번에 선고한 사건 중 인용이 딱 두 건인데 그 두 건마저 최상목 권한 대행이  마은혁 재판관 임명을 보류하고 감사원이 선관위 감사 결과를 발표함으로써 무시되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뭘까? 헌재가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는 것은 헌재 빼고는 다 아는 상식이 된지 오래다. 

  힘 없는 나는 이번에도 바보처럼 결과를 감내한다. 다만 시시비비 자초지종 자두지미 종두지미를 가리고 밝히고 남겨 시간의 재판을 받아보려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상당히 지루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흥미없는 내용이 전개될 것이기 때문에, 서울구치소 내 신기한 가십거리나 모종의 비하인드를 기대하고 블로그에 방문한 불행한 사람들은 나가길 추천한다. 

  국민 참여 재판법이란 무엇인가? 아니, 애초에 국민 참여 재판이란 무엇인가? 국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선진국형 재판 바로 그것이다. 우영우나 천지훈 변호사가 수행하는 그런 재판을 떠올리면 된다. 그게 실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다. 

  국민 참여 재판법은 국민 참여 재판을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법무부나 대법원에서도 이거 많이들 하라고 혈세 들여 홍보 영상 같은 걸 만들어 배포하곤 한다. 근데 현실은 드라마에서나 국민 참여 재판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법과 법원이 국민 참여 재판을 못하게 막고 있기 때문이다. 

  배제조항 때문이다. 배제조항에 따라 법원이 참여 재판을 불허하면 못한다. 근데 배제 사유를 보면 기이하게도 삼라만상이 다 배제사유가 될 수 있게끔 모호하다. 사실상 법원 맘대로다. '기타 등등'이라고 해놓으면 세상만사 천지만물이 다 해당된다고 자기 편의적으로 우기는 사람들이 출현하게 되는 법인데, 법원이라고 다를 리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 참여 재판은 권리나 의무는 고사하고 있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는 판타지적 개념이 되어 있는 실정이다. 타자의 허락을 필요로 하는 권리라면 그건 이미 권리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백 보 천 보 만 보를 제곱 해서 양보하고 보아도, 사법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해 도입된 국민 참여 제도가 사법부 자의에 의해 배제될 수 있는 건 신비로운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래, 제곱에 제곱을 더해 참여 재판을 못할 만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치자. 그래도 위의 3호는 너무하다는 게 내 시각이다. 이미 세상만사가 배제사유가 되어 있는 마당에 한 술 더 떠 참여재판을 성범죄 피해자가 거부하는 경우엔 할 수 없다니? 참여 재판을 하지말고 없애 버리자는 것과 다름없는 소리다. 이건 도대체가 논리적으로는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첫째, 재판이 끝나기 전까진 피고인이 무죄로 추정되어 피해자는 형식적인 피해자일뿐 실질적으로 '고소인'에 지나지 않는 데다 재판 당사자도 아닌데, 어째서 피고인의 참여 재판 의사가 피해자의 의사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가? 

  둘째, 범죄는 다종다양하고 살해 당한 피해자, 뇌사상태가 된 피해자, 장애인·어린이 등 의사를 밝힐 수 조차 없어서 보호를 필요로 하는 특수한 경우도 많은데, 다 차치하고 오직 성범죄 고소인의 의사만 배제사유로 삼는 게 타당한가?

  셋째, 도대체 무엇을 목적한 배제인가? 참여 재판 배심원은 방청객이 아니라 판사·검사처럼 법적 의무를 지고 절차를 형성하는 정식 참여자인데, 그들의 참여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겠다는 게 웬 말인가. 

  크게 보면 이 세 가지 의문이 핵심이다. 자신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서 국민 앞에 판단을 구해 보겠다는 피고인의 권리행사가 고소인의 허락에 달려 있다는 건 인지상정상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상대팀이 심판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 이는 너무나도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대법원마저도 말이 안 된다는 걸 인정한 바 있다. 

대법원 2016. 3. 16.자 2015모2898 결정

  대법원은 "피해자의 의사만으로 참여재판을 배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시 했다. 그런데 배제 자체는 인정했다. 무슨 소린가 싶을 것이다. 이는 양자역학의 중첩상태와 같은 난해함이니 이해가 안 가는 게 당연하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그 논리와 친척 관계라고 보면 된다. 피해자의 의사만으로 참여재판을 배제하도록 한 법률을 두고 피해자의 의사만으로 참여재판을 배제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적용을 하다니··· 인간계 논리가 아님은 분명하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대법원에게 법 자체를 부정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거라고 봤다. 윤창호 법처럼 위헌일지라도 법원은 법이 있는 한 그에 따라 판결해야 한다. 삼권분립 법치주의의 원칙이다. 법 자체의 위헌성을 판단하는 건 헌재의 업무다. 그래서 내가 헌법소원을 제기해 헌재의 판단을 요구한 것인데, 초장에 말했듯 헌재가 3년간 눈치 보다가 법원의 등 뒤에 숨어 꼬리 물기로 기각을 때렸다. 대책없는 얌체운전.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지만 바람직한' 아수라 법률이 합헌의 왕관을 얻어 굳어졌다. 그리하여 불행하게도 이제 성범죄에 한해 피의자는 국민참여재판을 고소인 허락 없인 받을 수 없다. 밝히려는 쪽과 은폐하려는 쪽의 의사 충돌에 있어 은폐하려는 쪽이 무조건적으로 이기는 구조다. 이는 성별이나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국민의 재판상 권리 문제이고 법 원칙의 문제이기에 헌재는 정말로 신중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그리스 신화 속 여관주인 프로크루스테스는 여행객이 오면 침대에 눕힌 뒤 침대 크기에 맞춰 늘여 죽이거나 잘라 죽였다. 그에게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자신의 침대가 유일했다. 국민 참여 재판법은 그 침대 같은 법이다. 모든 상황과 조건을 무시하고 고소인의 의사에 맞춰 피고인의 권리를 난도질한다. 그렇게 시작부터 도륙난 피고인의 권리가 재판 과정에서 지켜지거나 회복될 리는 없다. 실제로 성범죄 사건은 소추되면 폐쇄적으로 배심원은 커녕 방청객도 없이 답정너로 진행되기 부지기수다. 예단을 깔고 가는 것이다. 이런 추세는 막아야 한다. 잘못된 법은 고쳐야 한다. 그런데 이제 입법부가 법을 개정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바꿔 말하면 방법이 아예 없다는 말과 같다. 

  결국 사람을 잘 뽑는 게 답이다. 애초부터 사상이 상식적인 인물들이 법을 만들었다면 프로크루스테스가 탄생했을 리 없다. 이상한 사람들을 중요한 자리에 앉혀 놓으니 프로크루스테스가 만장일치로 옹호되는 기현상까지 벌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처구니 없게도 우리 모두가 감내해야 할 엄연한 현실이 된다. 선택의 시간은 돌아온다. 뒤늦은 기회나마 놓치지 않으려면 속지 말아야 할 테다. 보신주의와 대세주의에 물든 인물을 알아 보아야 할 테다. 프로크루스테스의 편에 선 자들이 누구일까?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련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헌법재판소법 제23조 1항 위헌소원  (0) 2025.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