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

누가 부수고 있는가

JBtracer 2025. 2. 12. 09:21

   대통령은 법이 무너졌다고 선언했다. 옳은 말이다. 다만 법은 이번에 무너진 게 아니라 원래부터 무너져 있었다. 대통령이 검찰 수괴이던 시절에도 무너져 있었다. 지금 대통령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모든 법적·사회적 피의자 처우는 내내 그래왔던 것이며, 이전까진 대통령 자신이 사회 물의 피의자가 된 적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피의자들을 사냥하는 강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무너진 법'을 편리하고 타당한 것으로 느껴왔을 뿐이다. 피의사실(허위사실) 공표, 여론몰이, 이간질, 예단, 공명심 채우기, 언론권 차단, 굴욕적 대우 등등은 단언컨대 내내 있어왔다. 우리 사법은 대상자를 법의 울타리 내에서 다루는 게 아니라 울타리 밖으로 내몰아 응징한다. 그리고 그것이 정의라고 우긴다.

  나에게 후단 사건으로 징역 5년이 추가되었다. 이를 전소와 합산하면 47년 4개월의 형량이 된다. 혹자에겐 정의롭고 통쾌한 양형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는 구체적인 재판 내용을 들여다 볼 필요도 없이 잘못된 결론이다. 

 

  형법 제42조(징역 또는 금고의 기간) 징역 또는 금고는 무기 또는 유기로 하고 유기는 1개월 이상 30년 이하로 한다. 단, 유기징역 또는 유기금고에 대하여 형을 가중하는 때에는 50년까지로 한다. <개정 2010. 4. 15.>

 형법 제38조(경합범과 처벌례) ①경합범을 동시에 판결할 때에는 다음의 구별에 의하여 처벌한다.

  2. 각 죄에 정한 형이 사형 또는 무기징역이나 무기금고 이외의 동종의 형인 때에는 가장 중한 죄에 정한 장기  또는 다액에 그 2분의 1까지 가중하되 각 죄에 정한 형의 장기 또는 다액을 합산한 형기 또는 액수를 초과할 수 없다. 단 과료와 과료, 몰수와 몰수는 병과할 수 있다.

  형법 제39조(판결을 받지 아니한 경합범, 수개의 판결과 경합범, 형의 집행과 경합범) ①경합범중 판결을 받지 아니한  죄가  있는 때에는 그 죄와 판결이 확정된 죄를 동시에 판결할 경우와 형평을 고려하여 그 죄에 대하여 형을 선고 한다. 이 경우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다. <개정 2005. 7. 29.>

 

  형법은 유기형 상한을 30년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경합범 가중시 2분의 1까지로 가중치에 한계를 두고 있고, 후단 사건의 경우 전소와의 형평을 고려하도록 의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45년을 초과하는 양형은 누범에게만 가능하다. 재판부가 법적인 선택지에 없는 형을 선고했다고 나는 본다. 반칙이다. 

  재판부를 원망하진 않는다. 사회적 지탄을 받고 중형을 받아 감옥에 오면,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인생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진지하게 다년간 되뇌어 보니 결국 모든 원인은 나에게 있다는 게 내 결론이다. 원망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오심도 나의 업보다. 이미 법적·사회적으로 끝장난 대상에게 사법이 공정함을 보이리라 기대할 순 없다. 간편하고 뒤탈없고 박수 받는 길이 있다면 그리로 마음이 기우는 게 자연스럽다. 누군가 자신의 생업에 있어 안전한 선택을 하는 걸 나무랄 순 없는 법. 진실은 애당초 나에게만 중요한 것이었고, 그렇기에 나는 이렇게 되리란 걸 예상했었다. 

  그래서 국민참여재판을 하고 싶었으나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대 측이 반대한다는 이유였고, 법이 그랬다. 무죄를 국민 앞에 밝히려는 피고인의 권리가 반대편의 거부 의사에 의해 묵살된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참여재판법을 헌재에 가져가 심사를 받고자 했다. 그러나 두 해가 지나도록 헌재가 결론을 내지 않고 있다.

  그래서 법원의 소송절차를 멈추고자 했다. 그러나 가처분조차 헌재가 해가 바뀌도록 결론내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3년동안 재판부만 붙들고 가망없는 설득을 시도한 끝에 지금의 성적표를 받게 된 것이다. 당연히 수긍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사법절차 내에서 저항할 것이다. 항소와 상고가 남아 있다. 부디 피고인을 법의 울타리 밖으로 내모는 '반칙 정의'는 이제 끝이 나길 바란다. 안 그럼 우리 법치엔 미래가 없다. 

  공허한 푸념이 아니다. 실제로 법이 무너지다 못해 가루가 되어서 사회 내에 법치를 신뢰하는 사람이 네안데르탈인처럼 멸종했고 죄다 여론전에 몰두하기에 이르렀다. 사법의 판단을 믿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정말로 아무도 없다. '법은 느리고 부정확하며 여론에 흔들리는 즉흥적인 그 무엇'이라고 모두가 믿고 있다. 그리하여 법원은 말할 것도 없고 헌재마저 정쟁의 중재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되어 있는 실정이다. 헌재를 비롯해 사법부는 자신들을 향한 분노가 부당하다고 보는 듯하지만, 그것은 법치가 자초한 불신이 오래도록 대책없이 쌓인 결과일 따름이다. 

 

 헌법재판소 법 제38조(심판기간)

 헌법재판소는 심판사건을 접수한 날부터 180일 이내에 종국결정의 선고를 하여야 한다. 다만, 재판관의 궐위로 7명의 출석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그 궐위된 기간은 심판기간에 산입하지 아니한다  [전문개정 2011.4.5]

 

  일례로 헌재는 180일로 규정된 심판기한을 지키지 않는다. 헌재가 훈시조항이라고 우겨서 법이 사문화되어 있다. 견제장치는 없다. 그래서 헌재에 접수된 사건은 기본 2년 스타트다. "국민의 권리가 달나라를 넘어갈 때 헌재는 신발끈을 묶는다"는 격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법원의 반칙을 막기 위해 청구한 '타당하고 정당하고 신속한 구제를 위해 필요로 하며 나뿐만 아니라 국민 다수에게도 이로운' 헌법적 사안들 역시 여느 힘 없는 국민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무려 수 년째 답보상태임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대법원이 임의로 만들어 수 십 년 째 강제 중인 '상고이유제한 법리'도 헌재가 심사를 방치한 탓에 지금 이 순간에도 수 많은 피고인들의 권리가 나날이 훼손되고 있다. 그렇듯 헌재를 믿고 기다리면 권리와 실익이 죄다 증발하는 게 일반적인 현실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헌재는 방통위원장의 가처분이나 헌법재판관 임명 관련 권한쟁의  등 '정치적으로 민감하거나 자기들 이익에 직결되는 사안'에 있어선 로켓심사를 보인다. 이는 당연히 비판의 빌미가 된다. 빠른 쪽에선 빠른 쪽대로 왜 자기들 것만 속도를 내냐고 항의하고, 느린 쪽에선 느린 쪽대로 왜 우리들 것은 느리냐고 항의한다. 이것은 부당한 '헌재 흔들기'가 아니라 헌재가 원칙 없이 사안들을 처리해 온 부작용일 따름이다. 

  존중·존경·경외심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헌재는 푸바오가 아니다. 막연히 헌재이기 때문에 사랑받을 순 없는 것이다. 헌재다운 헌재일 때 비로소 지지받을 수 있다. 번번이 일 다 끝나고 나면 막대기 들고 나타나 선봉대장이라고 우기는 식이어선 안 된다. 그동안의 헌재는 실로 그러했다. 줏대·소신·용기, 이런 단어는 헌재와의 거리가 구만리였다. 그리고 헌재는 누가 흔들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흔들려 왔다. 

  정족수가 문제되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반 년 가까운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냈던 헌재를 전 국민이 기억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방통위원장의 가처분을 이례적인 속도로 받아들여 정족수 조항을 정지시키더니, 이후 실제론 한 건의 선고도 못했으며, "6인으로 선고하면 안 된다"는 소리가 다름아니라 정족수 효력을 정지시킨 바로 그 헌재 내에서 튀어나왔던 모순을 모두가 목격했다. 

헌법 제113조 ①헌법재판소에서 법률의 위헌결정, 탄핵의 결정, 정당해산의 결정 또는 헌법소원에 관한 인용결정을 할  때에는 재판관 6인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헌재가 헌법만 바라보고 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헌법은 특정한 경우에만 6인 이상의 재판관 참여를 필요로 하고 있을 뿐이므로 7인의 심리를 의무화하는 헌재법은 애당초 헌법을 부당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재는 법을 가지고 정치권을 압박하는 메세지로 사용하다 내분을 보였고, 그 결과 누구도 헌재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다. '헌재는 재판관 몇 명이 공석이 되면 또 다시 허수아비가 되고 말거야'하는 불안을 '헌재가 정족수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여전히 품고 있다. 헌재의 법적인 결정을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사람  저사람 저마다의 이익에 따라 헌재의 판단을 무시할 꿍꿍이를 갖는 것이다. 헌재부터가 헌재결정을 못지키는데 그것을 준수할 사람은 없다. 헌재는 법치에도 실패했고 정치에도 실패한 셈이다. 

  나는 헌재가 올바로 가길 누구보다 바란다. 김신혜씨와 달리 나는 내가 이 나라 국민임을 한 시도 의심한 바 없다.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헌재가 이 나라 국민인 나의 권리를 지켜주길 기대한다. 나를 울타리 밖으로 내모는 사법의 반칙에 제동을 걸어 주길 바란다. 내 권리를 지켜 줄 수 없다면, 내 다음 사람의 권리라도 제 때에 제대로 지켜주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심판 정족수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킬 게 아니라 아예 그 법을 법전에 지워버리자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재가 냉큼 받아먹고 기운을 차리길 바란다. 흔들리는 자를 바로세우는 건 매가 아니라 부축임을, 나는 내가 흔들리며 배웠다. 그러므로 내 사안을 방치해 온 헌재이지만 나는 그 반대편에 서지 않고 헌재의 등에 우애 좋게 손을 얹는다. 

 법은 '다 함께 만들어 가는 관념'이다. 그런 법에 정답은 없다. 세상사람 가치관과 이해가 다 다르고 하나의 사실일지라도 여러가지 입장과 해석이 존재할 수 있는 바, 법에는 논리와 의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법은 무조건적인 수긍이 아니라 토론과 저항을 필요로 한다. 역풍이 있어야 높이 나는 매와 같다. 그리고 법에 있어서의 저항이란 법원을 때려 부수는 그런 저항이 아니라 법으로 맞서고 논리로 맞서고 원칙과 상식으로 맞서 반칙이 설 땅을 줄여 나가는 저항이어야 한다. 47년 4개월과  같이 사법이 '힘의 논리'로 밀어 부쳐도,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참고 관념으로 다퉈야 한다. 무너진 법을 불평만 할 게 아니라 널부러진 법의 조각을 주워 무언가 쌓고자 애써야 한다. 

  나는 타당한 주장을 제기해 왔으며 나의 무죄를 소명하기 위해 절차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가 47년 4개월이라는 기괴한 수치임은 내가 아니라 사법의 오점이고 사법이 후회할 일이다. 나는 절차 내에서 진실에 입각해 최선을 다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 선례를 쓰고 있는 것이며, 기록을 남긴단 생각으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언젠가는 밝혀진다. 기록이 남는 한 언젠가는 밝혀지고야 만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분명 쌓는 쪽이다. 지금 법을 부수고 있는 쪽은 내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어지러운 이 시국. 이럴 때일 수록 우리 각자는 다른 누구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과연 쌓는 쪽인가, 아니면 부수는 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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