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

그래도 지구는 돈다

JBtracer 2024. 8. 2. 13:48

[헌법재판소 공보]

   나는 헌재의 결정을 존중한다. 그 결정이 내 생각과는 다르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패와 불행이 일상화되면 왠만한 일엔 동요하지 않으며 반대의 시각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헌재의 공보활동이 세련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해당 위헌소원에 있어 청구인이 박사방의 총괄 책임자라는 사실은 본질하곤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헌재가 이를 사건 개요에 적시해 공개한 것은 청구인이 조주빈이라는 사실을 적시해 공개한 것과 차이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청구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kbs뉴스 헤드라인]

  실제로 언론은 강제추행죄가 합헌 결정이 났다는 사실보다는 조주빈이 강제추행죄에 대해 헌법소원을 냈다는 데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헌재의 공보 방식이 사안의 본말을 전도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도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청구인에 대한 기존의 선입견이 전제되어 본질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위헌소원의 내용 및 쟁점을 따져 보기도 전에 속단하게 만든다. 쉽게 말해, 이번 헌재의 공보 및 그로인한 보도를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일단 "박사방 그놈이 강제추행죄가 위헌이라고 했다고라!? 그거 아주 뻔뻔한 미친놈이구먼!" 하는 생각을 갖게 되리란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는 내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

  믿길지 모르겠지만 나는 미치광이가 아니다. 나는 당연히 강제추행죄가 필요한 법률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하게도 나는 강제추행죄를 법전에서 지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바 없으며, 이는 내 청구 논리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내가 헌재에 제출한 의견의 한 대목이다. 나는 강제추행죄 법 문언의 '해석'을 다투었을 뿐 이 세상 강제추행이 다 합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그 지점을 다투게 된 것은, 내가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에도 불구하고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관심없겠지만 최근 내 형량이 늘어났는데, 역시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해당사건에 있어 상대는 처벌을 원치 않았다(정확히 말하자면 공소가 제기되기도 전에 당사자간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묻지마 3년 구형을 때렸고, 법원은 구형량에 한참 못미치는 4개월을 인정했다. 누구에게도 의미없는 재판이 이루어진 것이다. 해당 사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삼가겠다(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고 설명하고 싶지만). 아무튼 당사자 의사가 무시된 채 형벌권이 남용되고 있다는 뭐 그런 얘기다.  

  좌우지간 강제추행죄의 위헌성 얘기로 다시 돌아와 보자면,

  현행 강제추행죄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건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얼마 전 강제추행죄에 대한 대법원의 판례가 수 십년만에 변경되었을 때 사회 각계각층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온 바 있다. 그 변경된 대법원 판례 내에서조차 대법관들의 의견이 합치되지 않았고, 이동원 대법관은 다수의견에 강도높게 반대했다. 

 

◼제298조(강제추행)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개정 1995. 12. 29>

 ◼제299조(준강간, 준강제추행) 사람의 심실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는 제297조. 제297조의 2 및 298조의 예에 의한다.<개정 2012.12.18>

 

   일례로 강제추행죄와 준강제추행죄는 처벌형을 공유한다. 똑같이 처벌된다. 그런데 강제추행죄는 피해자의 항거와 아예 무관하게 의율되고, 준강제추행죄는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일 것을 요구한다. 대법원의 변경된 법리대로라면 준강제추행죄의  구성요건의 수위가 강제추행죄의 구성요건을 아득히 초과하게 되는데, 이로써 피해자를 항거불능의 상태에 빠트려 추행을 한 사람과 피해자의 항거를 곤란하게 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완전히 똑같은 처벌형이 적용되고 마는 것이다. 이게 법적 균형에 맞는 현상일까? 이동원 대법관이 이를 지적했고, 나는 그의 의견을 그대로 차용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헌재는 왜인지 이 부분을 아예 판단하지 않았다). 간단하게 말해, 나는 독창적인 의견을 개진한 게 아니라  현직 대법관의 의견 및 사회 내 우려의 목소리를 취합해 헌재에 제시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 헌재가 합헌 결정을 했으니 이제부터 우리 모두 그걸 현실로 받아들이고 기준 삼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번 헌재 결정으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은 '조주빈은 역시 미치광이'라는 게 아니라 '변경된 대법 판례에 대한 반대 의견이 힘을 잃었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 헌재의 결정은 조주빈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국민 전체에게 적용되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강제추행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헌재의 결정일지라도 개인의 생각까지 재단할 순 없는 것이다. 나는 현행 강제추행죄가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헌재가  내 의문에 부합하는 답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강제추행죄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부작용이 계속해서 발생하리라 예상한다. 여러분 대다수는 추행이 먼 나라 이야기일 뿐 자신의 삶에선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고 있을 테지만, 실상 추행시비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불시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다. 대통령실 경호처 직원도 휘말릴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추행시비인 것이다. 그리고 성범죄에 있어서 만큼은 유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신고가 들어가면 결론이 정해지고 수사가 시작된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헬스장 무고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수사기관은 "너 북한 다녀 왔지?" 하던 중정처럼 답을 정해 놓고 피의자를 몰아간다. 그러므로 나는 알거니와, 내가 강제추행죄의 위헌성을 다툰 마지막 사람이 되진 않을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른 뒤에, 우리 사회는 분명히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하게 될 테다. 

   끝으로 내가 하나 더 무지무지 강하게 밝혀두고 싶은 건!  내가 헌재를 존중한다는 사실이다. 비록 내가 그들로부터 배려받진 못했지만서도 나는 그들을 존중한다. 현재 내가 제기한 몇 가지 헌법소원이 심리 중이라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헌재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니 강제추행죄에 대한 내 위헌소원이 기각된 것은 내가 사회 일각의 우려를 조리있게 전달하지 못한 탓이라고 해두자. 훗날 다른 누군가에 의해 헌재가 설득되리라 기대해 보며, 나는 또 하나의 실패를 새기고 간다. 

 

 

 

 

   [덧붙이는 말]

[2024.7.23 뉴시스 기사 中]

   뉴시스가 보도한 기사의 한 대목이다. 뉴시스는 내가 미성년자를 강제추행한 사실로 추가형을  확정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의 혐의는 미성년자를 강제추행한 게 아니었다.  물리적 접촉으로서의 강제추행도 아니었다. 애초에 형법 298조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강제추행죄를 규정한 법률이 아니다. 정확한 사실 검증 없이 상업적 기사를 쓰는 일은 사이버렉카와 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사안을 이해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기사를 쓰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우리가 여기서 새겨 보아야 할 점은 우리가 이 정도 수준의 기자들에게 우리의 알 권리를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조주빈이 강제추행죄의 위헌성을 다투었다는 사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사회적으로 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위헌소원 결과는 강제추행에 대한 변경된 대법 판례가 헌법적으로 용인되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뉴시스의 왜곡 보도에서 찾을 수 있는 사회적 가치는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담론에 있어 당사자의 목소리가 소거되어선 안 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