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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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Btracer 2024. 1. 26. 07:59

 

   하루 아침에 가자지구에 온 기분이었다. 총만 안 들었지 인간 기본권에 대한 인식 수준은 하마스 무장세력의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어쩌면 그 미만일 우리네 교정이었다. 교정당국은 단지 나를 향한 사회적 비난 여론이 우세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법적·실체적 근거 없이 네이버에 공문을 보내 블로그를 차단케 하고 징벌을 부과하겠다며 조사를 개시하고 서신을 검열하고 언론과의 접촉을 금지시키는 등 나의 사회적 해명을 다방면으로 습격해 좌절시켰고, 이는 공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된 반헌법적인 야만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로선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중해야 했다. 기본권이 걸린 맞짱은 낭떠러지에서 이루어지는 법. 지는 순간 인간의 자격을 박탈 당하고 불가촉천민이 되고 말 터였다. 이미 비공식적으로 나는 인권이 없는 동네북이자 철저한 사회적 객체이자 집단린치 맛집으로 전락한 지 오래지만, 그것이 공식적으로 용인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은 풀어 나가고 다투어 가면 된다. 그러나 다툴 권리를 도난당하면 방법이 없다. 방법이 없으면 끝이다. 어쩔 수 없다고, 다른 길이 없다고 결론 내게 된다. 나는 내가 그 마지노선에 서 있음을 알았다.

  섣불리 누구처럼 단식이라도 했다간 배만 고프다 그치거나 끌려가서 식도에 호스를 삽입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 끝에 미래지향적이라는 현 정부 기조를 따르기로 마음 먹었다. 과거를 뒤로하고 내게 철퇴를 때렸던 법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소송전이 시작되었고, 교정당국의 수준은 더더욱 그 민낯을 드러냈다. 그들은 정말로 하마스 사람이라도 된 듯 한국의 법률과 절차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봉창 두드리는 소리만 늘어 놓았다. 그들에겐 동네북이 수감방에서 쓴 조악한 소송서류조차 당해 낼 능력이 없는 것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패소는 물론이요 소송비용까지 다 물게 되었고 항소기간 내에 항소마저 하지 못해 소송은 1심 한 번만에 확정되었다. 검찰총장 징계 취소 소송에서보다 빠른 굴복이었고, 교정당국의 권위가 공식적으로 사망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범인 앞에 도망치거나 몰래 마약파티를 벌이는 경찰을 경찰이라 생각지 않는다. 99만 원 세트를 받아 먹거나 사건을 조작했다가 공소를 취소당하는 검사를 검사라고 생각지 않으며, 출장 중에 성매매를 하거나 50억 클럽에 가입한 판사를 판사라고 생각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법에 근거해 재소자를 관리할 의지도 능력도 없으며 도리어 재소자로부터 교정받고 교화당하는 교정기관이라면 그건 더 이상 교정기관이 아니다. 나는 K-교정의 전반적인 수준이 아직도 신영복씨가 감옥으로부터 사색하던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정은 엉망이다. 저열한 인권의식을 장착한 채 보신주의에 찌들어 있다. 그래서 안팎으로 비난 받으며 왕따 비슷한 위치에 처해 있다. 사회로부터 무시당하고 재소자로부터도 무시당한다는 건 우리 교정이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는 교도관들이 예능 프로를 전전하며 눈물겨운 고충을 쏟아낸다고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교정당국은 자신들을 향한 국민적 신뢰도가 바닥인 이유를 '교도관들의 고충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아서' 혹은 '드라마에서 교도소를 악의적으로 그려내서' 그런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엉뚱한 망상이다. 교정당국이 천대 받는 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수준 이하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사례를 들어 말하자면 '여름에는 집단 식중독 일으켜서 여럿 골로 보낼 뻔하고 가을에는 특수강도 피의자를 사회에 깜짝 선물하는 등 분기별로 대형사고나 치기 바쁜 사고뭉치이기 때문에' 교정당국이 천대 받는 것이다. 더 집요하게 말하자면,

  군산에서 30대 재소자가 원인불명 사망했는데 해가 바뀌도록 아무런 발표조차 않고 언제나처럼 은폐한 채 조용히 넘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과밀수용을 방치하며 인권을 유린한 끝에 6000만 원을 혈세로 물어주게 되었기 때문에,

「시사저널 뉴스 中」

  교도관이 트렌스젠더 재소자의 성매매를 용인하다 중징계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모든 일이 23년 한 해 동안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교정당국이 천대받고 있는 것이다. 교정당국은 내내 전국적으로 형편없는 만행을 일삼아 왔고, K-교정이 하마스나 미얀마도 한 수 접어야 할 만큼 심각하게 병들어 있음은 누구도 부인 못할 진실이다.

  병든 교정은 병든 재소자를 낳는다. 아주 명징하게 직조한다. 보편적인 사람들은 생애 한 번도 겪기 힘든 징역을 두 번 세 번 겪고도 정신 못 차리고 애먼 사람에게 돌려차기를 날리거나 칼부림을 하는 전과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최근 화제가 된 자웅동체좌도 사기 전과자가 복역 후 더 큰 사기를 친 경우였다. 롤스로이스 사건도 마약 전과자가 또 마약을 해 더 큰 사고를 친 경우이고, 서울구치소의 깜짝 선물도 강력범이 또 강력범이 된 경우였다. 이외에도 '이전보다 더 중한 범죄자가 된 사례'는 손가락 발가락을 다 써도 셀 수 없을 만큼 수두룩하다. 그리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사회에 부과된다. 러시안 룰렛 같은 것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돌아갈지 알 수 없다. 결국, 오늘날 최대 문제는 이코노미나 데모크래시가 아니라 교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적 교정을 만든 스튜피드는 누구일까? 박범계일까? 한동훈일까? 아니다, 그들에겐 교정을 어떻게 할 능력이 없다. 특검은 거부하는 자가 범인이라는데, 교정은 방치하는 자가 범인이다. 즉 우리사회 우리 모두가 오늘날 교정을 만든 장본인인 것이다. 정부 전산망이나 카톡이 몇 시간만 마비되어도 눈이 뒤집히는 우리들이건만, 유사이래 줄곧 먹통인 교정체계에 대해선 누구하나 추궁은 커녕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는 현실. 우리는 덮어놓고 엄벌만을 촉구해왔다. ‘잡아넣고는 싶은데 교도소는 짓기 싫어’, ‘일말의 자비도 베풀면 안 되지만 반성하긴 바라’, ‘비난하고 싶댔지 누가 변명 듣고 싶댔나?’ 이런 식으로 내게로온당 현수막 같은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예컨대 나는 ‘15년 복역 후 출소하는 김근식보다 ‘15년 복역 후 출소를 목전에 둔 상태에서 시민 사회가 반발함에 따라 검찰이 허위 영장 쳐서 구속기간 연장 당하고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김근식의 출소를 저지시킨 최초 영장은 김근식과 상관 없는 혐의로 드러났다) 화학적 거세를 검토 당하다 끝내 별건으로 5년을 추가당한 뒤 출소할 김근식이 더 우려되지만, 우리 동료시민들에겐 후자의 경우가 전자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묻고 떠블로 가는 문화'에 심취해 부메랑을 던지는 일이다. 우리는 범죄자라면 당연히 교화되지 않으리라 전제하고서 언제까지고 배척하는 동시에 그가 문제없는 사회구성원으로 거듭나길 요구한다. 그렇게 우리는 번번이 '떠블'을 마주하게 되고 그 떠블들을 싸이코패스로 규정짓고 넘어간다. 기막힌 처방이 아닐 수 없다. 경각심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우리는 우리의 모순된 정의관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정의관은 누군가 핸드백을 받은 사실을 밝혀내는 정의관이 아니라 자신이 남에게 핸드백을 주고선 그 사실을 폭로하는 정의관이다. 사회구성원을 중대범죄자와 동료시민, 이렇게 딱 두 부류로만 감각하는 정의관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타도해 없애 버려야할 대상만이 존재한다. 누군가 사회적 도마 위에 오르면 일단 죽어라 때리고 본다. 죽어라 때리다 죽으면 별안간 충격을 받고 그때부턴 또 수사기관과 언론을 죽어라 때린다. 결국 우리 사회 내 비난 받지 않는 존재는 없다. 경찰도 비난받고 검사도 비난받고 판사도 비난받고 범인도 비난받고 피해자도 비난받고 기자도 비난받는다. 여론의 요구에 따라 사건 사고마다 피의사실 공표해주고 포토라인 세워주고 살인적인 수사 해주고 징역 수십년·무기·사형 구형 남발하다시피 하는 우리네 법치인데 어째서 사법신뢰도는 바닥을 기는 걸까? 여론이 원하는 자극적인 보도 해주는데 어째서 치킨 수신료는 낼 수 있어도 방송 수신료는 내기 아깝다는 국민정서가 팽배하고 이름값 못한다며 KBSBS취급을 받는 걸까?

  샹포르는 말했다. 여론은 모든 의견 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라고. 주워들은 터라 샹포르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참 맞는 말이다. 여론은 부정확하고 수시로 변하며 자제력이 없고 책임을 지지않는다. 그러므로 여론이 기준이 되면 그건 기준이 없다는 의미와 같다. 그런데 작금 우리 사회 내 거의 모든 일은 여론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 그 결과 사회 전반이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움직인다. 그렇게 얻어진 결론은 통쾌할지언정 신뢰받지 못한다. 나를 향한 교정당국의 제재가 그 실례다. 여론의 감정에는 부합하겠으나 그로 인해 교정당국에 대한 신뢰도는 박살이 나는 것이다. 정당한 룰 내에서 재소자에게 패배하는 교정당국을 신뢰할 국민은 없다. 마찬가지로 여론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기관 중 신뢰 받는 기관은 없다. 박수를 받는 것과 신뢰를 받는 건 별개의 일이다. 사회전반에 신뢰가 실종된 이유다.

  물론 여론이 무조건 잘못된 건 아니다. 나는 나를 향한 지탄 여론이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잘못된 이해를 토대로 한 여론이 비난을 넘어 실체를 왜곡시키고, 그렇게 왜곡된 결과가 또 비난을 초래하는 '오류가 오류를 낳는 순환'은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여론은 명백히 잘못된 여론이고, 당연히 대응해야 하고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가 강제로 신상을 공개하고 신체를 묶어 포토라인에 세운 것은 당사자를 공론의 장으로 떠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내던져진 사람의 입을 막아버리면 공론, '공정한 의논'은 이루어질 수 없다. 대상자는 사회적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전락하고 무분별한 폭력과 조롱만이 난무할 뿐이다. 이로써 사법 신뢰도는 무너지고 만인의 만인을 향한 가해 정서만 무럭무럭 자라난다.

  실제로 정유정의 신상이 공개되자 네티즌들이 정유정의 사진을 성형시키며 가지고 놀았다. 이게 우리가 바라는 정의일까? 살인자의 사진을 장난감 삼아 즐기는 무서운 인성을 지닌 동료 시민이 우리 사회에 늘어나면 어떻게 될까? 이는 국가와 언론이 부추긴 결과다. 마음껏 조롱하고 욕하고 인격을 말살시키며 스트레스를 풀어도 되는 사회적 쓰레기통을 만들어 줬으니 국민은 신나게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목말라 한다. 국가는 계속 던져줘야 한다. 그래서 무리를 하게 된다. 하다하다 부부를 쌍으로 신상공개하고서 사형을 구형하더니 결과는 징역 8·6년이 나와 버렸다. 공소유지에 실패해 형사법체계의 균형이 개박살 나 버린 것이다. 국민 배우는 가학적 수사 끝에 한 줌의 재가 되었다. 경찰은 누가 보아도 그간 수사 대상자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가학적 수사를 즐겨 놓고선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형식 절차상 문제가 없다며 발뺌하고, 언론은 신나게 물어 뜯어 놓고선 이젠 또 경찰을 뜯기 바쁘다. 우리 정의의 현주소다. 기준조차 없다. 힘이 세 보이길 원했던 사람은 만천하에 공개해 주고, 어떤 확신범은 꽁꽁 숨겨 버린다. 이유는 번번이 ‘귀귀코코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걸 수 있고 누구에게든 안 걸 수 있다. 엿장수식 신비로움이 법치에 도입되어 있는 것이다.

「 이데일리 뉴스 中 」

  그리하여 현재, 신상공개제도는 위헌심사 중에 있다. 회술레 문화가 드디어 존폐의 기로에 선 것인데, 결과는 두고 볼 일이다.

  우리 사회엔 성역이 너무 많다. 볼드모트처럼 말조차 꺼내면 안 되는 주제가 차고 넘친다. 그래서 공론의 장이 망가져 있다. 목소리 큰 몇몇이 반대의견을 다 지워버린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50.1%49.9%를 타도해 말살시키는 민주주의다. 우리의 광장은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광장이다. 우리에겐 김정은이 없지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기 바쁘다. 살기 위해선 돌을 던지는 편에 서야 한다. 제일 먼저 달려가 포스트잇을 붙여야 한다. 달걀을 던져야 한다. 오해였음이 밝혀지면 돌을 던졌던 사람들에게 돌을 던진다. 그렇게 세상이 돌무덤이 되어가고 있다.

  내게는 교정당국의 지도부보다 상식적인 주장을 할 정도의 사리분별 능력이 있다. 나는 미친 사람이 아니다. 정신이상을 앓고 있지 않다. 누구나처럼 나도 자신의 행동에 따를 책임을 가늠해 본 뒤 행동하며, 도덕적 갈등이라는 정상적인 억제를 거친 뒤에 말하고 행위한다. 나는 내 또래 평균적인 삶을 살아 왔다. 나도 디지몬과 포켓몬을 좋아했고 정규교육을 받았으며 대학에 가고 군대에 다녀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엇이 상식적이고 무엇이 비상식적인 일인지 판단할 수 있는 사회적 경험치가 내게는 있다는 것이다. , 내가 앞으로 2차 가해를 한다거나 범법적 주장을 할 일은 없다. 나는 국가가 나를 사회적 논의의 대상으로 세웠으므로 사회적 오해에 해명하고 부당한 공격에 대해 최소한으로 방어하려는 것일 뿐이다.

  대중 매체 속 범인들은 검거된 이후에도 하나 같이 경악을 금치 못할 언행만 일삼는다. 도대체 왜 그럴까? 정말로 그럴까? 그들은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라도 되는 걸까? TV나 신문도 안 보는 걸까? 왜 그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주장만 하는 걸까? 욕을 먹어도 괜찮은 걸까? 두려움이 없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애초에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이다. 혹은 엄청나게 왜곡·과장된 것이다.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보도는 곰곰 살펴보면 당사자가 공론의 장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무렇게나 기사가 나도 반론이 제기될 수 없는 것이다. 확인할 길 자체가 없다. 그런 사회적 논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치는 없다.

  어느덧 감옥에서 맞이하는 다섯 번째 해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지났다. 계속 재판이 거듭된다. 항상 비슷한 전개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고 인정해서도 안 되는 어떤 답을 정해 놓은 사람들이 있고, 나는 내가 뭘 해도 그들의 답이 변치 않으리란 사실을 안 채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설득한다. 똑같은 악몽을 반복해서 꾸는 것과 같은 기분. 정신을 차리면 내 주장은 다 무시되어 있고 TV에 내가 나온다. 나를 빼 놓고 내 얘길 하고 있다. 추징금을 칠 만원 밖에 안 냈대. 새로운 범죄가 밝혀졌대. 이은해한테 편지를 보냈대. 형량이 또 늘었대. 아버지를 가스라이팅 했대. 가석방을 노리고 있대. 사회복무요원으로부터 개인정보를 제공받아 성을 착취했대. 신종 사이코패스래···

  갑진년에는 좀 값진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공론의 장에 나도 낄 수 있기를 소망한다.